체인

 벨을 울려도 아줌마는 비켜주지 않습니다 덕분에 이렇게 맑은 소리가 세상에 울리네요…… 바퀴를 움직일 힘으로 벨을 울립니다 소리가 아줌마를 뚫고 달려가 당신에게 도착합니다

 당신이 전화를 겁니다
 따르릉
 당신과 나 사이 몇 명의 아줌마가 있었습니까

 세월이 지나도 당신은 벨 소리를 들으면 비켜주는 사람이길 바랍니다
 그럼 나는 당신을 좋아하게 될 텐데

 오랜 뒤 바퀴가 더는 쓰이지 않는 세상이 찾아왔고

 나는 전화를 겁니다 온 힘을 다해 따르릉
 따르릉
 당신은 보이지 않고 전화를 받지도 않고
 인공위성이 몇 주기 공회전하는 동안 주파수가 늙어버립니다 나와 당신 사이 얼마나 많은 행성이 정체되고 있는지 아십니까
 외계인들이 하나같이 벨을 울리기 시작하고

 지구에 동그라미들이 달려와 부딪칩니다 그건 절대 비킬 수 없겠군요…… 소리를 낼 힘으로 나는 한 발 한 발 떼기 시작합니다 
 침공당해가면서
 비포장 된 우주만을 찾아 걷다가
 시간이 뚫리고 찢어지다가

 미래 계획에 펑크가 나버렸습니다

 (망가진 운명을 가지고 왔습니다
 수리해줄 수 있나요?)

 새 공기가 운명 속으로 채워집니다
 타이어 빛으로 하늘이 부풀다가

 돌아가면서

 따르릉
 오늘 아침은 정말 맑겠습니다

 저기 당신이 보입니다 벨을 울리지 않아도 뒤를 돌아보네요 예쁘게도

 브레이크를 잡습니다

 당신과 나 사이 이제 무엇이 있겠습니까

 


 박주훈: 동그라미 동그라미 동그라미들

감정을 토해내는 방법

박한별, 감정을 토해내는 방법(사진2).JPG

 감정을 토해내는 방법.
 눈물로, 말로 토해내다가 체하고 말았다.
 눈을 감고 입을 닫았다.
 감정은 내 몸통 안에 갇혀 나갈 구멍을 찾아 
 내벽을 온몸으로 처대 내벽에 멍이 들었다.
 멍은 환기가 안 돼 곪고 진물 난다.
 겨우 찾은 구멍은 손끝이다.
 손끝으로 감정을 토해낸다.
 그것이 펜의 끝이 됐든 셔터의 끝이 됐든.

산타를 기다리는 한 가지 방법

 먼저… 눈을 갖고 싶어요. 검은자가 흰자 속으로 들어가 버린 것처럼 흰 눈은 말고요. 가끔 혀가 바싹 마르면 뭐든 기다릴 수밖에 없더라고요. 그건 무채색 자존심 같다고, 잠들기 전 낭이가 그랬어요. 잠든 순록들은 너무 무서워요. 낭이의 손을 잡으면 잡지 않은 쪽이 허전해졌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아무거나 참고 견디지 말기로 했지요. 그저 중얼거리는 일보단 시끄러운 입이 좋았습니다. 낭이의 혀가 나의 혀를 감고 도는 율동, 코가 코를 잠시 비켜나야만 한다는 걸 알았어요. 표정은 그저 하나만으로 충분하던데요? 권태로운 화학작용, 낭이가 그랬어요. 실컷 하고 나면 조금 불행해지는, 그런 행위라고요.

 그때 빨간 눈이 왔습니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잠든 루돌프의 큰 입가에는 물때가 가득하고— 높은 굴뚝에서 덜 타버린 재가 툭툭, 깊은 밤을 깨운다. 그러자 덮인 부조리 더미에서 산타가 깨어났다. 그는 까만 정장을 입고 매끈한 구두를 신으며 무타티스 무탄디스*, 하고 외친다. 빨래 건조대에서 하얗고 큰 보따리를 챙기면서. 산타는 행위에 대해 생각해본다. 예를 들어 입맞춤이라든가, 빨간 것들은 더 빨간 것 속에 담긴다는 오래된 책의 제목에 대해서. 아차, 사람들은 모두 기다리고 있다. 출근하는 산타는 바닥에 수북한 것을 본다. 그것을 담는다. 보따리가 물들고. 어쨌든 뭔가 시작되겠지. 그는 시작되는 것들을 기다린다. 그는 사실 잘 기다리는 사람이다.

 가끔 지나는 말로 거짓말을 하는 아이에게는 새빨간 것을 주자고 했어요. 모두들 그렇게 하니까요. 낭이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어요. 모두 빨갛다고 했습니다. 저요? 저는 볼 수 없었습니다. 저는 눈을 기다리는 사람이니까요. 언젠가 저도 눈을 만날 수 있겠지요. 낭이는 들판을 달려온 순록처럼 제게 빨간 눈에 대해 말해주었습니다.

 키스 같아!

 산타는 먹구름이 싫다. 양복을 드라이클리닝 해야 하므로. 그의 종착지는 한 곳, 이 보따리가 전해지는 곳. 아무래도 괜찮겠지. 저 멀리 들판이 있고, 들판의 모서리에 작은 집이 있고, 그 안에는 꿈에서 만난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그는 목표 지점을 정확히 조준, 보따리를 푼다. 빨간 보따리에서 더 빨간 것들이 쏟아졌다. 푸르르. 푸르르.

 그때, 낭이와 나는 기다렸어요. 이 세상에 기다리는 사람들만 가득하다고 여기면서요. 뭘 기다렸는지는 모릅니다. 낭이와 나는 그것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거든요. 그저… 나는 잠든 순록의 큰 입가를 생각했습니다. 나는 거짓말쟁이입니다.

 

 * Mutatis Mutandis. 바꿔야 할 것은 바꿔서.

 


 윤정기: 기다린다고 말하면, 기다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십일월

 나의 피부는 짜투리로 만들어졌다.

 줍고 포개고 쓸모를 찾는 억지와 함께

 묘지에 흩어진 꽃씨를 정돈하는 관리인의 일과로.

 누구도 나를 만들지 않았겠지만

 누구도 나를 모른다곤 할 수 없다.

 손을 빨면 물의 맛이 났다.

 물속에서 가져온 핏줄도 있으리라.

 나무의 물성으로 쓰여지는 시가 있듯이

 혈관으로 때 묻은 비명이 흐른다.

 전등을 켠다.
 비밀은 스파클라보다 따갑게 오른다.

 오래 잘수록 키가 자라났다.

 죽은 자들만 아는 원리처럼

 거대한 그림자를 탐내는 소년들.

 나는 어제보다

 더 많은 사람을 빌려 왔다.

기억에 갇혀 본 적 있소?

 당신, 기억에 갇혀 본 적 있소?
 아니 내 말은 그 기억이 아니라
 
 ㄱ
 기역을 말하는 거요. 그러니까 내가 그녀에게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른다 했다가 영영 이별한 기억을 정녕 모른단 말이오? 내가 한 말은 그 말이 아니었는데 그녀는 그 말이 그 말 아니냐 묻고 난 그냥 말이 그렇다 말하니 그녀는 말을 어찌 그렇게 말할 수 있냐 그랬지. 나는 더듬이처럼 ㄱ을 더듬다 아차, 그 기역이 아닌데 여하튼 기억을 만지다 풀썩 그녀에게 변명을 못 한 게 한이 되어 새벽 내내 어떻게 말을 할까 고민하지만 도통 기역 말고는 떠오르는 게 없소. 그니까 ㄱ을 볼 때마다 그녀 생각이 나는데 이 기억을 어떻게 전할지 말을 못 하겠소. 어떻게 말로 하겠소? 사랑은 사랑이 아니고 그녀는 그녀가 아닌데. 당신, 그래서
 
 말에 갇혀 본 적 있소?
 
 여간 답답한 것이 나는, 여전히 그녈 기역하는데 분명 그녀는 그놈의 기억 때문에 날 기역하지 않을 거란 말이지. 하지만 나는 말을 다 해 그녀 기역을 기억하면서 이 기억을 변명하려 말을 하는데, 그만 ㄱ에 갇혀 일언반구도 못 했다지. 사랑하는데, 그런데 그걸 말로 한다 해서 기역이 기억이 되지 않더군. 이 밤에 자꾸만 ㄱ이 기억나지만 차마 사랑한다 말은 못하고 내 말은 그 말이 아니다, 말이 아니다, 뱅뱅이 돌다가 혀만 씹고 나왔을 뿐이지. 그러니 사랑은 거참 텅 빈 말이 아니겠어? 기역은 기억이 아니고 사랑은 말로는 안 됐지. 아무리 말해도 기억나는 건 그녀 기역일 테니까. 그래서 형씨, 당신은
 
 기역에 갇혀 본 적 있소?

목소리는 흩어진다

 하늘이 높지 않고 많을 때가 있다
 많아서 어지럽고 메스꺼울 때
 찢어져서 펄럭거리던 현수막
 늘 다른 모습이었다

 노을이
 한 조각 필름인데, 그림자는 침묵은
 의자와 함몰된 무릎뼈
 낙차가 커서 저편으로
 사라지는 물소리
 잘린 성대는 길을 잃고
 혼자 길을 찾는다

 건넸던 말들이 모조리
 안개 속으로 사라지고 있는데
 앉아 있는 동상에서
 지문을 발견할 수 있다면
 나는 무언가를 믿을 수 있겠지
 따뜻한 수프나 공원에 붙은 포스트잇
 가지들이 무성하게 말라 비틀어져 있다

 다른 곳으로 손가락이 구부러질 때
 의식하지 말고 귀를 기울일 것
 불온한 상자 안에서
 나오지 말라고 일러둘 것
 어차피 목소리는 흩어진다

 


 김학윤: 대답은 들었어요. 질문이 너무 많다는, 푸념.